2003년 앤디 루빈(Andy Rubin)이라는 뉴욕 출신의 젊은이가 모바일 운영체제를 개발해 공짜로 공급하겠다는 아이디어 하나로 안드로이드라는 회사를 창업했다.앤디 루빈은 안드로이드를 설립한 다음 해인 2004년에 삼성 전자의 경영진과도 만난 적이 있다. 당시에는 노키아 다음으로 주목 받던삼성 경영진들이 8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안드로이드 팀을 만나 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앤디 루빈은 삼성에 그의 아이디어를 설명하기 위해서 자비로 한국을 방문했다. 피처폰 제조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던 삼성 입장에서 공짜로 모바일 기기용 운영체제를 제공하겠다는 혁신적이며 파괴적인 루빈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삼성 내부에만 이 천 여명의 개발 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8명의 팀으로 된 루빈의 안드로이드 팀의 제안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성공하고 있을 때, 그것도 돈을 벌고 있을 때 스스로 성공의 틀을 깨고 새로운 변화를 가져 오는 것은 개인도 마찬가지지만 기업 입장에서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루빈 입장에서는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자유롭게 일하는 미국의 벤처 문화에서 자라다가, 검정색 양복과 넥타이 부대로 둘러 싸인 기업을 만난 것은 아마 잊을 수 없는 대단한 문화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래리는 루빈의 안드로이드에 관심을 갖었다. 반면에 구글 회장 자리에 있던 에릭 슈미트는 안드로이드에 대해서 래리처럼 확신을 갖을 수 없었다. 루빈의 안드로이드는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루빈의 절친인 스티브 펄만(Steve Perlman)은 조건없이 10,000 달러를 주었고, 그 돈으로 루빈은 간신히 회사를 운영할 정도였다. 모바일 운영체제인 안드로이드의 미래에 대해 낙관하던 래리는 에릭과 상의도 없이 세르게이와 함께 2005년 안드로이드를 인수해 버렸다. 안드로이드 인수는 세간에 화제가 되지도 못할 정도의 작은 규모였다. 천 만원도 없어서 허덕이던 작은 안드로이드 팀이 세계 모바일 운영체제의 왕좌 자리를 차지할지 그 때 누가 알았을까?
하지만 래리는 루빈의 안드로이드에 관심을 갖었다. 반면에 구글 회장 자리에 있던 에릭 슈미트는 안드로이드에 대해서 래리처럼 확신을 갖을 수 없었다. 루빈의 안드로이드는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루빈의 절친인 스티브 펄만(Steve Perlman)은 조건없이 10,000 달러를 주었고, 그 돈으로 루빈은 간신히 회사를 운영할 정도였다. 모바일 운영체제인 안드로이드의 미래에 대해 낙관하던 래리는 에릭과 상의도 없이 세르게이와 함께 2005년 안드로이드를 인수해 버렸다. 안드로이드 인수는 세간에 화제가 되지도 못할 정도의 작은 규모였다. 천 만원도 없어서 허덕이던 작은 안드로이드 팀이 세계 모바일 운영체제의 왕좌 자리를 차지할지 그 때 누가 알았을까?
애플과 구글은 매우 협력적인 관계였다. 공동의 적인 마이크로소프트가 있으니 더욱 그랬다. 애플의 이사회 자리에는 2006년부터 에릭 슈미트도 있었다.2007년 나온 애플의 아이폰에는 구글의 Gmail 과 구글 맵, 유투브가 기본으로 탑재되었다. 하지만 영원한 동지는 없는 것일까? 어제의 동지가 하루아침에 적으로 돌변하는 곳이 바로 비즈니스 세계다.애플이 아이폰을 발표하고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기업들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이폰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매출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자 노키아나 삼성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사실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구글 역시 핸드폰 제조사 못지 않게 영향을 받았다. 훌쩍 다가온 모바일 시장에서 애플이 애플의 OS로, 애플의 기기로 앞서가기 시작했으니 구글 입장에서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애플이 아이폰의 웹브라우저인 사파리에 디폴트 검색 엔진을 구글이 아닌 다른 검색 엔전을 사용한다면 어찌 될까? 모바일 광고 시장에서 구글이 밀려나는 것은 애플 맘 먹기에 달릴 것이다.애플은 스티브 잡스의 구상대로 여태 보지 못한 쿨(Cool)한 소프트웨어와 단순함을 추구하는 하드웨어 디자인으로 구성된 아이폰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잡스는 앱 스토어를 통해서도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었다고 칭송 받으면서 수익을 거두어 들이고 있었다. 반면 구글은 남의 집 잔치 구경하는 꼴이 되었다.애플은 자신이 만든 플랫폼 위에서만 협력하기를 원했다. 앱스토어에 앱을 등록할 수는 있지만, 앱스토어 자체를 컨트롤 할 수는 없었다. 이미 현실이 되었지만 애플이 마음 먹기에는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자신의 사업 영역과 겹친다면 앱을 거부할 수도 있다.이제 친구들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니었다. 애플이 차지한 모바일 시장은 구글의 내일이었다.
아이폰이 출시된 해인 2007년 말, 구글은 개방형 휴대폰 동맹을 출범했다. 요지는 구글이 갖고 있는 모바일 운영 체제인 안드로이드를 무료로 배포하는 것이었다. 페이지와 브린은 안드로이드는 구글이 만드는 폰 뿐만 아니라 모든 스마트폰을 위해 공개하는 무료 운영체제라고 발표했다.
애플 쓰나미에 밀린 구글 입장에서는 대안이 없는 선택이었지만 이런 구글의 안드로이드 공개는 공짜 검색, 공짜 소프트웨어를 배포하고 이를 기반으로 검색 결과에 광고를 싣어 수익을 내는 구글의 기본적인 전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처음에 안드로이드 팀은 블랙베리와 같은 키보드 기반으로 스마트폰을 개발 중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아이폰이 등장하면서 터치 기반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한다. IT 강국은 지난 10년 간 한국이 표방한 가치였다. 삼성과 LG 는 모바일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었다. 조금만 하면 노키아도 넘어 볼 수 있을거 같았다. 한국은 높은 역동성과 세계 최고의 인터넷 환경을 자랑하는 유비쿼터스 환경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보다 하드웨어에 집중하고 있었고, 한국의 전체 IT 매출 중에 하드웨어 비중이 70%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소프트웨어의 비중은 8%도 채 되지 않았다. 한국은 하드웨어 기술을 뛰어나지만 두뇌에 해당하는 소프트웨어에는 서투른 평가를 받았다. 그래도 삼성의 휴대폰 판매는 눈부셔서 브랜드와 인지도가 급상승하고 있었다.하지만 애플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달라졌다. 애플은 아이폰 하나로 이익율을 30% 정도 가져오고 있었다. 제조업의 이익율이 10%가 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시절이었다.노키아는 여전히 피처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십수년간 휴대 전화의 제왕으로 군림해 온 노키아는 아이폰의 존재감에 대해서 장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해가 안될 정도로 고집스럽게, 자사의 스마트폰 OS인 심비안에 매달렸다. 노키아는 미국 시장에 대해서도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는데, 삼성이나 LG가 통신사들에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고 협력 관계를 넓혀가는 동안, 대도시에 자체 매장을 열고 통신사와 계약 없이 직접 휴대폰을 파는 방식을 고수했다. 휴대폰 보조금이 없는 비싼 노키아 폰이 잘 팔릴리가 없다.
삼성 경영진들은 노키아와는 달랐다.게다가 운좋게도 애플의 아이폰에 들어가는 제품의 주요 협력사는 삼성이었다. 애플이 플래시 메모리를 대량으로 주문하면서, 아이폰 시장이 얼마나 커지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애플에 부품 판매를 하면서 얻는 수익에 만족하지 않고 삼성은 스마트폰 시장에 진입하기로 결단을 내린다. 심지어 애니콜이라는 브랜드마저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대목은 노키아가 피처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중저가 시장을 맴돈 것과는 대조가 된다.삼성은 무선 사업부를 전면에 배치하고, 과거 옴니아 등을 개발하던 인력까지 총투입하여서 2010년 T/F(Task Force)를 구성했다.과거에도 꾸준히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모바일 운영체제에 기반하여서 다양한 옴니아 시리즈의 스마트폰을 출시하였으나,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었다.가장 큰 고민은 이런 휴대폰 운영체제의 선택이었다. 자체 개발로 갈까 아니면 윈도우 모바일 기반으로 다시 개발해야 하나?
고심 끝에 삼성은 구글의 안드로이드를 선택한다. 구글조차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이름도 생소한 안드로이드를 선택한 이유 중에 하나는 오픈 소스였기 때문이다.
오픈 소스 진영은 세력을 형성하기 쉽기 때문에 업계 표준을 제정하여 시장 규모를 키울 수 있을 것이다. 구글이 설령 애플의 독주를 막지 못하더라도 안드로이드 진영에 다른 기업들이 합류하다면 힘을 합쳐 애플의 지배 막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애플이 만든 운영체제와 디자인한 아이폰으로 구성된 다소 폐쇄적인 비즈니스 구조는 80년대 초반 Mac이 IBM 호환 PC 진영에 패했던 예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다른 휴대폰 제조사들이 끼어들 수 없는 애플의 폐쇄적인 구조에 대항하여 구글과 힘을 합쳐 새로운 스마트폰을 개발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1년 여의 치열한 개발끝에 2010년 6월 갤럭시 S를 출시하였다. 당시 갤럭시 S는 애플의 아이폰의 허술한 모방작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받았으나, 국내와 해외 시장에서 갤럭시 S는 아이폰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꽤 인기를 끌었다. 결국 삼성전자와 구글에는 새로운 구세주로 탄생한 셈이다. 이에 고무된 삼성전자는 후속작인 갤럭시 S II 를 2011년 4월에 출시하였다. 당시 스마트폰에는 사용되지도 않던 듀얼 코어 CPU 등을 도입하면서 오버 스펙 폰으로 불린 갤럭시의 두번째 작품은 시장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안드로이드를 휴대폰 제조사에 개방한 구글 조차도 갤럭시 S가 이처럼 잘 될지는 미쳐 몰랐다.
사실 삼성의 갤럭시와 구글의 안드로이드의 확산에는 애플의 전략도 한몫했다. 철저하게 애플 중심의 아이폰 제조와 유통 방식은 통신사에게는 크게 반감을 사게 된다. 물론 사용자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혁신이기도 하였지만, 전혀 통신사를 배려하지 않고 애플의 소프트웨어와 제품에 통신사의 로고나 소프트웨어가 탑재되는 것을 원칙적으로 불허하였다.이것은 애플 입장에서는 단일 제품과 단일 소프트웨어가 탑재된 라인업을 유지하면 되므로 매우 제품 관리가 간편하고 비용이 적게 드는 반면 통신사의 반발을 피할 수는 없었다.
사실 삼성의 갤럭시와 구글의 안드로이드의 확산에는 애플의 전략도 한몫했다. 철저하게 애플 중심의 아이폰 제조와 유통 방식은 통신사에게는 크게 반감을 사게 된다. 물론 사용자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혁신이기도 하였지만, 전혀 통신사를 배려하지 않고 애플의 소프트웨어와 제품에 통신사의 로고나 소프트웨어가 탑재되는 것을 원칙적으로 불허하였다.이것은 애플 입장에서는 단일 제품과 단일 소프트웨어가 탑재된 라인업을 유지하면 되므로 매우 제품 관리가 간편하고 비용이 적게 드는 반면 통신사의 반발을 피할 수는 없었다.
반면에 삼성과 같은 휴대폰 제조업체들은 기존의 국가별 통신 규격과 통신사의 요구 사항을 잘 이해하는 협력적인 관계 가운데 있었다. 아이폰에 소외된 통신사들이 갤럭시를 밀수 밖에 없다.어째든 고맙게도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전면에 내세운 삼성의 갤럭시 시리즈의 성공은 구글로 하여금 모바일 시장에서도 검색을 통해 주도권을 쥐게 만들어준 고마운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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